승범(承汎)마당

우리 이웃들의 천사

승범(承汎) 2013. 11. 12. 17:34

                                                                          우리 이웃들의 천사

     어느날 천사가 한 마을을 찾아왔다. 천사는 초라하고 헐벗은 걸인의 모습으로 마을 집집마다 문을 두들기며 돌아 다녔다.

 사람들은 저마다 보기 흉한 한 걸인이 문 앞을 서성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문을 꼭꼭 걸어 잠그기에 바빴다. 천사는 그 마을에서 갈 곳이 없었다. 다만 가난한 소녀만이 걸인이 된 천사의 방문을 받아들였으며 천사에게 따뜻한 밥과 국물을 대접해 주었다. 천사는 그날밤 그 소녀의 집을 축복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천사는 내내 걸인의 모습으로 우리가 사는 마을을 서성이며 돌아 다니고 있다. 천사는 멀리 있지 않다. 우리가 손을 내밀어 도와 주어야 할 우리 이웃들의 헐벗은 얼굴에, 우리에게 도움을 전해 주는 고마운 이들의 손길에 천사는 깃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몇해 전 여름 나는 선배 가족과 함께 낡은 자동차 한대 빌려 강원도를 여행한 적이 있었다. 오래된 미니 봉고였는데 이 차가 낡아도 보통 낡은 차가 아니라서 여행 초반부터 우리는 마음이 불안불안했다. 그래도 겨우 여행을 끝내고 밤 열시 쯤 마지막 숙박지를 찾아 대관령 고개를 넘어가는 순간, 그만 덜컥 차가 길 한복판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때의 난감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달은 밝아 주위는 대낮처럼 밝고 길가 개울을 따라 흘러가는 물 소리만 요란한데, 왜 그리도 밤 개구리가 수선스럽게 울어대던지 아네와 나는 플래시를 밝혀들고 고장난 봉고 뒤편에 멀찌감치 물러서서 스쳐가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들어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말 하자면 당신이 달려가는 차 앞쪽에 고장난 차가 있으니 주의 하라고 미리 신호를 보내는 뜻도 있었지만, 아울러 가능하다면 차를 세워서 고장난 차를 봐 주고 기술이 있으면 고장난 부분을 고쳐 달라는 구원 요청의 몸짓도 담겨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나도록 한밤중 국도위의 차량들은 무서운 속도로 지나가기만 할 뿐 한 대의 차도 우리들 앞에서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내처 손을 흔들면서도 이게 무슨 부질없는 것인가 싶어 쓴 웃음만 나왔다. 핸드폰도 터지지 않는 지역이라 정말이지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몇 시간쯤 손을 흔들고 있을 때 갑자기 추럭 한대가 와서 멈추더니 운전사가 대뜸 웃옷을 벗고 차에서 내려 우리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오히려 너무 적극적인 모습이라 지례 우리가 겁이 날 지경이었다. 히지만 운전사는 겉보기만 우락부락하게 생겼을 뿐 참으로 세심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는 낡은 봉고의 뚜껑을 열고 이것저것 들춰 보더니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말했다.

    "아무래도 내 기술로는 안 되겠소. 고장도 보통 큰 고장이 난 것이 아니오."

    그때 또 저 캄캄한 어둠속에서 해드라이트를 밝히며 택시 한대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택시 기사 또한 차의 엔진을 이리저리 손 보더니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우리의 얼굴을 한동안 멀거니 처다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차 밑에까지 기어 들어가 한참을 부스럭 거리며 무언가를 보는 듯했다. 그사이 갈 길이 바쁜 트럭 운전사는 떠나고 우리는 택시 기사가 문제의 원인을 찾아 고쳐주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택시 기사가 차 밑에서 나와 우리에게 말핬다.

     "안 되겠소. 더 늦기 전에 이 차를 정비공장에 갖고 가서 고쳐야겠소. 내 차에 체인을 달고 이 차를 천천히 정비공장에 끌고 갖다놓고 다시 오겠소. 그동안 도로에 앉아 계시오. 그러면 내가 다녀와서 당신들의 목적지인 용평 스키장까지 데려다주겠소."

     그날 우리는 그 친절한 택시 운전사의 약속대로 안개낀 대관령을 무사히 넘길 수가 있었다. 안개가 무성하게 피어있는 대관령 산자락을 넘어가는 동안 나는 그 운전기사의 인간적인 따뜻함에 깊은 감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정말 평범하고 소박한 우리 주변에 있는 이웃들 중에 한 명이었던 것이다. 천사란 그리 먼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가을 나는 다시 강원도 설악산을 찾았다가 도로 위에서 곤혹을 겪게 되었다. 미리 여행을 떠날 치밀한 계획 없이 무작정 설악산으로 단풍 구경을 할 셈으로 길을 떠난 우리 가족은 가는 날이 장날이라 아비규환의 만원 사태로 북적이는 설악동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일방적인 내 배짱으로 떠난 여행은 그만 그곳에서 덜컥 암초에 걸리게 되었다.

     도대체가 여관도 만원, 민박도 만원, 속초도 만원, 양양도 만원, 강릉도 만원, 가는 곳 마다 대만원 사례였다. 애당초 설악제가 열리는 시기를 모르고 무조건 길을 떠난 내 불찰이었다.

     별 수 없이 우리는 밤중에 또다시 대관령을 넘어 하룻밤 묵을 숙소를 찾아 길을 떠날 수 밖에 없었는데, 그만 달려가던 차가 갑자기 배탈이라도 났는지 덜컹 멎는 것이 아닌가.

     숙소도 정해지지 않았고, 떠날 길은 바쁘고, 타고 가야할 차는 고장이 났고, 몸은 피로한 가운데 간신히 설악동에 있는 주유소를 찾았다.

     나는 떼라도 쓸 요량으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세차장의 문을 부서져러 두드렸다. 문이 열리고 세명의 정비공들이 곤한 잠에 빠져들어 있다가 부스스 눈을 뜨고 나를 보았다. 그들은 짜증이 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사정을 하자 그들은 하품을 하고 느릿느릿 차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갑자기 놀라운 속도로 한 사람은 차의 뚜껑을 열었고 또 한 사람은 차 안에서 시동을 걸었고 한 사람은플레시를 비추고 있었다. 그들은 눈부신 슈퍼맨처럼 5분도 체 못되어서 차를 고쳐 놓았다.

     내가 고마워 사례를 하려 했더니 그 사네들은 약속이나 한듯 손을 절래절래 흔들며 말했다.

     "대수롭지 않은 고장인데 느냥 가보슈."

     그러나 나는 나데로 모른체 물러설 수 없었다. 아네가 트렁크에 들어 있던 김밥을 생각해냈다. 사례를 안 받는 대신 김밥이라도 드시오. 하고 김밥 두 상자를 내밀었더니 그 사네들은 그제야 기름 묻은 손으로 덥석덥석 김밥을 들어 한 입씩 배어 물면서 "그것 참 맛있네.고맙소. 그럼 잘 가슈"하고 집안으로 몰려 들어 가는 것이었다.

 

     우리는 흔히 천사를 날개가 달린 성스러운 모습으로 표현하고 악마를 눈이 충혈되고 두개의 뿔을 가진 흉측한 모습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실제의 천사는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천사가 실제로 날개를 가진 거룩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모든 사람이 그를 알아보고 그를 기꺼이 맞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악마가 혀를 날름거리는 흉측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우리는 악마에게 속지 않고 그를 먼저 피해 버릴 것이다.

     모든 천사들도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예수가 다시 태어난다면 아마도 그는 내 곁에 살고있는 아저씨의 모습으로 태어날 것이며 부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천사들은 우리 주변에 있다. 바로 우리 이웃들의 얼굴에, 함께 부대끼며 이 복잡한 속세 지옥을 견디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어깨 위에 천사는 언재든지 그 날개를 접고 쉬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조금 마음을 열어 우리 주변을 돌아볼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날개를 지닌 천사가 될 것이다.

                                                                           2013,   11,   5.

                                                                                                     최인호의 인연에서

                                                                                                                           해 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