普賢山 山行記
2013년 3월 10일(일) 영천향우회 주관, 한마음시산제를 겸한 보현산 산행길에 동참, 잠실 운동장역에서 뻐스에 올랐다.보현산은 경북 영천시 화북면과 청송군 현서면, 포항시 죽장면 경계에 있는 높이 1,124.4m로 국내에서 가장 큰 천문대가 있는 산이다.
보현산은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산 중턱에 있는 법룡사까지 소풍을 간 적이 두어번 있었다. 그리고 중학교 다닐 때도 소풍을 가본 적이 있는데 그때 처음으로 정상 시루봉까지 가본 적이 있는 산이다. 그 이후 50수년이 지난 오늘 보현산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의 내 마음은 감회가 새롭기도 하고 설레임 마저 찾아든다. 그때의 기억이라곤 법룡사 절과, 절에서 시루봉 가는 길에 절 뒷편으로는 큰 바위벽이 있었고 그 밑에 있는 능선길은 키를 훌쩍 넘는 억새풀 숲인데 10여미터 앞에 가는 친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우거진 억새풀 숲만 기억에 가물거릴 뿐이다. 그런데 이번엔 산행코스는 그때완 반대로 정각리 절골쪽에서 출발 가파른 길로 시루봉을 향해 올라갔다.
1코스: 화북면 정각마을회관-> 절골-> 정상
2코스: 화북면 용소리 보현산 휴개소-> 법용사-> 정상
3코스: 화북면 보현리 보현산 휴개소-> 작은보현산-> 정상
4코스: 죽장면 두마리 대태고개-> 정상
5코스: 죽장면 두마리-> 면봉산-> 밤티재-> 정상
6코스: 청송군 무계리 칠미기재-> 딴봉-> 정상
우리는 1코스로 올라갔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길도 있었는데 우리는 그 길이 있는지도 모르고 능선을 따라 올라 갔다. 길도 사람들이 많이 다니던 길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그 길뿐인 것으로 생각하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올라 갔다.
산행길 입구 저 멀리 보이는 것이 천문대다. 그 왼쪽이 정상 시루봉이다.
아직도 나뭇가지는 앙상하고 풀잎도 잘 보이지 않는다. 겨울 산 같았다.
그래도 우물에서 시원한 생수를 두레박으로 퍼 올려 한잔씩 마셨다. 그리고 바로 그 위가 보현사 절이었다. 절을 지나 포장 길로 좀더 올라갔다.
드디어 포장 길을 벗어나 산길로 오르기 시작했다. 등산다운 길이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부터가 보현산 냄새를 제대로 맡을 수 있는 산행길이다. 처다 봤을 때는 가깝게 느껴졌지만 무척 가파른 길이다. 나무숲 사이사이로 이어지는 완전 흙길이다. 주위엔 물도, 바위도 없다. 원래 보현산은 둔중한 육산이다. 거기다 가파른 흙길을 택했고, 그 흙길이 표면은 봄이라 질퍽질퍽하고 그 속은 아직도 녹지 않아서 엄청 미끄러웠다. 집사람은 올라 가면서 몇 번이나 미끄러져 넘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신발이며 바지가 흙 범벅이 되었다. 그러니 산행 속도는 늦을 수밖에 없었다.
힘들게 올라오는 모습이다. 그러나 조용히 앉아서 쉴 수 있는 장소도 마땅치 않았다. 질퍽하고 가파른 흙 길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들면 그 자리에 서서 잠시 쉴 수밖에 없었다.
날씨는 맑고 청량했다. 그러나 흐르는 물소리는 들을 수도, 볼 수도 없었다. 새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기암괴석은 아니더라도 바위 하나도 볼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둔중한 육산이란 말이 실감난다. “이정도의 가파르고 미끄러운 길이라면 처음부터 다른 길을 안내 했어야지, 여자들 만이라도”라는 불만의 소리도 들렸다. 실재로 우리는 시산제가 거이 끝날 무렵에 도착했다. 뿐만 아니라 식사가 끝나고 남은 것이 없어서 남은 반찬에 막걸리 한잔으로 점심을 때웠다. 나중에 들어 보니 주관하는 팀에서는 충분히 준비를 했는데 우리 회원이 아닌 산행 꾼들이 여기 와서 식사를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 일행들은 ‘힘들고 배 고팠던 산행 꾼들에게 보시한 걸로 생각 하자’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정상이 가까워졌는 것 같다. 힘내자!
조강호 회장님도 힘드시나 보다. 서서 휴식 중이시다. 그런데 회장님께서는 시산제 전에 도착 하셔야 할텐데… 그 래도 회장님의 책무 땜에 발걸음을 재촉, 빠르게 올라 가셨다.‘시산제 시작 시간에 겨우 도착하셨다’고 나중에 들었다.
여기쯤 오니 길도 좋아졌고 질퍽거리지도 않았다. 힘이 솟아나는 것 같다. 힘내자!
이재는 앉아서 휴식을 취할 수도 있다. 보현산 등산에 보람도 느껴진다.
저기 정상이 보인다. 등산이란 이런 맛으로 하는 것이다.
정상에 올라가서 광활하게 펼쳐진 파도 같은 작은 산봉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노라면, 사람들이 사는 곳이란 저렇게 조그마한 골자기에 불과하구나 정상에서 보기엔 밥알만한 집 한 체에 바둑판 한 칸도 못 되는 논밭전지만 있어도 부자소리 들으면서 살고 있을 것이다. 그것 보다는 정상에서 광활하게 펼쳐진 이 광야를 내 눈 안에 넣고 내려다볼 수 있는 내가 더‘부자다’라는 생각도 든다. 이것이 정상정복의 쾌거다. 대도시도 마찬가지다. 큼직한 산과 산 사이에 자그마한 골자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면 정상에 올라서면 올라오는 과정이 힘들고 괴로웠어도 정상정복의 쾌감으로 다 잊어버리고 승리자의 쾌감을 느끼게 된다. 이 또한 산행의 보람이다.
이것은 우리 인생의 삶과도 같다. 사회 어떤 분야에서든 정상에 오른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정상에 올라가는 길은 험하기 마련이다. 괴롭고 힘든 길이다. 때로는 넘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는 좌절하고 포기할 수도 있다. 산행중에 힘든다고 중도에 하산 하는 격이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고 굴러도 다시 일어나서 정상을 향해 뚜벅뚜벅 걷는 자 만이 정상을 정복할 수 있다. 물론 올라가는 길이 조금은 쉬운 길도 있고 힘 드는 길도 있다. 그러나 그 선택은 본인이 한 것인 만큼 자기가 선택한 길은 자기가 이겨내고 극복해야 한다. 그래야만 정상정복이 가능한 것이다. 넘어지고 포기한자에겐 정상정복이라는 쾌거는 없다. 우리들의 삶 또한 그렇다. 정치인이든, 기업인이든, 예술가든, 공직자든 마찬가지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보현산 정상 시루봉에 도착했다. 시산제가 끝날 무렵 늦게 도착했지만 그래도 정상정복 기념사진 한장 찰깍. 사진으로 보니 미인들이네.누군지는 몰라도.
그리고 이 보현산에는 성벽이라곤 없는 산이란다. 성벽이 없다는 것은 전쟁이 없었다는 증거다. 그런데 사찰은 많다. 그렇다면 그때부터 전쟁이 없는 평화지역이었다는 증거다. 그리고 보현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강물은 금호강 상류의 지류로서 영천시민들의 젖줄 역할을 하는 것이다. 보현산을 모자산이라고도 한다. 전쟁없는 보현산의 ‘평화의 정기’와 둔중한 육산의‘묵직한 정신력’과, 모자산의 ‘사랑의 정기’가 담긴 젖을 먹고 자란 우리 영천시민들은 행복하다. 또한 영원히 간직하고 이어 가야 할 정신세계의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내 고향 영천이란 참 좋은 곳이다. 우리는 복 받고 태어났다.
시루봉에서 바라본 천문대, 산 넘어 희미하게 산 처럼 보이는 것은 산이 아니라 구름이다. 하늘은 청명한데 저 구름은 외 생겼을까?
시루봉에서 내려다 본 전경. 맑은 날에는 동해 바다가 보인다고 한다.
하산할 때는 천문대 앞 주차장에서 향우회에서 준비한 봉고 승합차를 타고 주차장까지 내려 왔다. 이 1코스는 천문대까지 포장도로가 만들어져서 승합차, 소형 뻐스도 다닐 수 있는 길이다. 하산할 때는 등산 맛을 보지 못하고 하산한 셈이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 가 봤던 2코스(용소리 보현산휴개소->법용사->정상. 왕복 5시간 소요))가 그리워 졌다. 다음에 다시 한번 와야 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료를 뒤져 봤다.
멀리서 바라본 普賢山은 코끼리를 닮았다. 코끼리를 불가에서는 普賢이라고 한단다. 그래서 이산을 普賢山이라고 했고, 그 이전에는 정각 쪽에서 바라보면 엄마가 아기를 품고 있는 모습이라고 해서 모자산(母子山)이라고 했단다. 그리고 보현산은 사방 어디서 봐도 같은 모양이라고 한다. 한편으론 부약산 법룡사라는 말도있다. 이에 관한 전설이 한가지 있다.
보현산에서 30여킬로 떨어진 곳에 영천시 화산이라는 곳에 한 농부가 살았는데 그 부자 농부가 나병이 걸려서, 그 부인이 저녁 해가 지고 땅거미가 밀려오면 기도에 쓸 떡과 밥을 해서 머리에 이고 쉰질바우(바위의 방언) 밑으로 가서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남편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렸다. 비가오나 바람이 부나 춥거나 덥거나 상관 하지 않고 정성을 다해 기도를 올렸다. 이를 딱하게 지켜보던 시아버지가 그 쉰길바우 밑에 자그마한 움막을 하나 지어 주었다고 한다. 그 후로는 그 움막에서 자면서 기도를 올렸다. 그러던 어느날 곤히 잠 들었는데 꿈에 어떤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너의 그 정성이 갸륵하니 한가지 약을 가르쳐 주겠다. 지금 당장 아래(현재 절이 있는 위치)로 내려 가면 붉은 열매가 있는 풀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캐서 기도를 올린 너의 왼쪽 손가락의 피를 뽑아서 함께 달여서 남편에게 먹이라. 그러면 너의 남편의 병이 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깜짝 놀라 눈을 뜨니 꿈이었다. 온몸은 땀에 젖어 있었다. 바로 아래로 내려와보니 정말 붉은 열매가 있는 풀이 있었다. 그 풀을 캐서 집으로 와서 너무 좋아서 왼쪽 무명지를 아예 작두로 잘라서 그 피를 받아 풀과 함께 달여 먹였더니 남편의 병이 씻은듯이 낳았다고 한다. 그 후 남편의 동생 즉 시동생이 똑 같은 병에 걸렸는데 그 부인 동서에게 거기 가서 기도를 올리라 했더니 죽었으면 죽었지 도저히 못하겠다고 해서 그럼 내가 또 가서 기도를 올려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곳으로 가서 정성껏 기도를 올렸더니 역시 그 신령님이 나타나서 전과 같은 이야기 하길래 이번에는 쉰질바우 밑 기도하던 그 옆에서 산삼을 캐서 이번에는 왼쪽 가운데 손가락을 작두로 잘라서 그 피로 달여 먹였더니 역시 시동생의 나병도 깨끗이 나았다고 한다. 그 후 논밭을 팔아서 산삼을 캔 그곳에 절을 하나 지었는데 영천, 청송, 대구 등지에서 소문을 듣고 몰려든 신도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래서 이 집안은 더욱 부자가 되었고 이 절이 바로 법룡사다.
그래서 부약산(夫藥山)이란 글자 그대로 남편의 약을 캔 산이란 뜻이다. 법룡사(法龍寺)는 기도를 올리면서 용꿈을 꾸고 어려움을 헤쳐나갈 법도를 얻었다고 해서 法龍寺라 했고, 쉰질바우는 사람 신장의 50배의 높이라는 뜻으로 붙여 졌으나 절이 생기면서 부처바위로 바뀌었다고 한다.
주차장에서 버스르 타고 영천땜을 지나 임고서원으로 갔다.임고서원(臨皐書院)은 圃隱鄭夢周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명종8년(1553)에 건립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 되었고, 1600년에 고천(古川)옛터에 초가 한 칸을 지어 영정을 봉안 하다가 선조36년(1603년)에 道一洞(현 良巷里)에 移建하였으나 고종8년(1871) 서원철폐령으로 훼철(毁撤)되었다.1965년 복원하여 포은 선생의 위패만 봉향하였다. 1990년에 임고서원중건성역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거액의 국고금과 시, 도비를 받아 文忠祠를 비롯하여 內三門, 由正門, 講堂, 興文堂, 東齋, 修省齋, 西齋, 涵育齋, 尋眞閣, 典祀廳, 永光樓 등을 건립하고, 神道碑와 事蹟䠋를 세워 제도를 완비하고 1999년1차 성역화 작업을 마치고 移安告由行事를 거행하였으며 2001년 芝峰 皇甫仁을 제배(躋配)하고 제2차 성역화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포은 선생은 이방원의 초청을 받고 응했다. 선생은 老少同樂하는 것을 즐겨하셨다. 老는 少의 용기를 배우고, 少는 老의 사려(思慮)를 배워 노소가 절차탁마(切磋琢磨)함이 수양의 요체라는 것이 선생의 사상이기도 했다. 이 자리가 죽음을 예고한 자리가 되었다. 여기서 방원이 먼저 선생을 회유하기 위해 ‘하여가’를 읊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두렁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 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좌중에선 박수소리가 일고 선생은 그 뜻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담담하게 ‘단심가’를 읊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좌중엔 적막이 흘렀다. 누군가가 “임이 누구입니까? 하고 묻자 선생은
“임이란 나라일 수도 있고, 임금일 수도 있고, 내 마음일 수도 있는데 그 모두는 하나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오니 이것으로 피차 갈 길이 정해진 것이다.
그후 선생은 선죽교에서 방원이 보낸 조영규의 쇠도리깨에 의해 처참한 죽음은 맞이하였다. 선생이 선혈을 뿌리고 죽은 선지교 돌 틈 사이에서 하루밤 사이에 푸른 대나무가 솟아났다. 충절을 상징하는 대나무를 본 사람들은 선지교를 선죽교라 고쳐 부르며 선생의 충절을 기렸다. 이 때부터 선지교가 선죽교로 바뀐 것이다. 1392년 4월4일 이렇게 고려의 큰 별, 아니 동방의 큰 별이 지고나니 7월 500년 고려 왕업이 문을 닫고 말았다.
(포은선생숭모사업회 圃隱 先生 略傳에서)
조강호 회장님께서 회원을 대표하여 焚香再拜를 올리셨다. 영천시장 모습도 보이네
충효관
신서원 모습
임고서원 방문을 끝으로 5대의 뻐스에 나누어 타고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차 안에서는 흥겨운 노래자랑 시간이 벌어졌고, 한편으로는 보현산과 임고서원을 본 느낌을 정리도 해 보고, 자랑스런 내 고향을 그리는 향수에 젖어 눈을 감기도 하면서 집으로 향했다.
2013, 3, 25.
해 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