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비움의 미학
아파트 단지 입구, 초등학생과 엄마, 학원 버스를 기다리던 중 엄마의 잔소리에 볼멘 아이가 소리를 친다. "무슨 방학이 이래? 난 방학이 싫어" 맨날 학원만 가는 게 무슨 방학인냐고. 그러자 엄마가 중얼댄다. "어휴,이러는 나는 좋은 줄 아냐?
요즘 여름방학, 초등학생 자녀와 엄마 사이의 흔한 대화이다. 조금이라도 공부를 더 시키려는 엄마와 조금이라도 더 놀고 싶어하는 어린 자녀사이의 팽팽한 대치. 그 모습을 지켜보다 예전 나의 여름방학을 떠올린다. 그 시절의 나의 "방학(放學)" 한자 그대로 풀면 '공부를 놓는다.'는 본연의 방학에 충실했다. 그해 여름도 그랬다. 방학동안 주일학교 여름신앙학교도 가야했고 시골 친척집 순례도 해야했고.... 노느라고 너무 바빠 일기쓰기도 미루었다. 개학이 코앞에 닥쳐서야 벼락치기를 하려니 무었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는 건 고작 몇일. 나머지 날들은 모조리 시로 채웠다. 시집에서 옮겨 쓴 동시도 몇 편 있었지만, 거의 대부부분을 즉흥적으로 생각나는 걸 '시'랍시고 적었다. 그랬더니 개학 후 제출했던 일기장에 담임선생님께서 이렇게 적어주셨다. "한꺼번에 몰아서 쓰느라 애섰구나, 시 감상 잘 했다."
예로부터 여름은 시의 계절이었다. 고려시대에도 사학에 다니는 학도들은 음력 5~6월이면 50일가량 하과(夏課)라고 해서 사찰에 가서 시를 쓰고 외었고 조선시대 서당에서도 한여름에는 손에서 책을 놓고 시를 지으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는 아니지만 나는 여름이면 시집을 산다. 특히나 이번 여름은 이일 저일이 맞물려서 기나긴 방학은 고사하고 사나흘의 휴가조차 제대로 찾을 수 없는 처지. 어딜 가든 노트북과 함께 시집을 챙긴다. 바쁜 일정 가운데에도 틈은 있는 법. 그 틈을 이용해 짬짬이 시가 주는 여백의 미를 탐한다.
오늘도 바쁜 원고를 넘긴 후 시집을 뒤적이다가 깜빡 잠이 들었던 모야이다. 깨어서 보니 sns단체대화방이 왁자지껄하다. 초복 중복을 제대로 복달임을 못했으니 마지막 말복만이라도 잘 챙겨보자며 무었을 먹을 것인지 열띤 토론 중. 저마다 제시하는 보양식이 다양도 한데 선뜻 끼어들지 않고 관망할 뿐이다. 이렇게까지 복날을 챙겨야하는 걸까 회의가 들어서다.
과거에 못 먹던 시절이야 어느 특정한 하루라도 잘 먹어서 건강을 챙겨야 했겠지만 요즘이야 어디 그런가. 평상시에도 너무 잘 먹어서 다이어트니 어떻게든 덜 먹으려고 애를 스는데 말이다. 이제는 복날 문화도 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어떤 이들은 너무 많이 먹어서 탈이 나는 요즘이지만. 이런 요즘도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이들이 있다.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꽉 막힌 열악한 환경에서 시어버린 깍두기 국물에 찬 밥 한 술 말아먹기도 어려운 형편, 하루하루 힘겹게 버티는 이들을 위해 복을 나누는 건 어떨까. 지구상에서, 기아와 영양 실조로 1분에 23명의 어린이가 죽는다는데 '식량이 부족' 해서가 아니라 나눔이 모자라'서 그런 거라 하지 않는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테드(TED)강연에서 멸시 받고 살아가던 사마리인이 다친 사람을 돌봐 준 이야기를 하시며 '인류애'에 대해 말씀하셨고 기아로 신음하고 있는 지구촌 사람들에 경각심을 일깨우셨지 않았던가. 그래, 더없이 뜨거운 이 여름의 마무리는 '비움의 여백'이 좋겠다. 분명 비운 만큼 마음은 선선(선선)하리라.......***
-방은영 마리안나(방송작가)-
2017, 8, 7
천주교수원교구 '위로의 샘'에서
승 범(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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