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좌절의 순간
출구는 어디에 있나요?
이 글은 이병철 회장님께서 신부님께 질문한 24가지 중 “지구의 종말은 언재 오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차동엽 신부의 답 가운데 일부입니다.(잊혀진 질문 중에서)
2011년 1월 중순경, 미국인의 심장에 대한민국의 자긍심을 새겨주고 있는 강영우 박사 일행과 오찬을 가졌습니다. 강영우 박사는 2006년 7월, 미국 루즈벨트재단이 선정한 ‘127인의 공로자’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포함된 인물입니다. 이 127인에는 록펠러, 맥아더 장군, 헨리키신저 전 국무장관, 빌 클린턴과 레이건 전 대통령,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또부시 대통령 당시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를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가 시각 장애인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중학교 재학 중 외상에 의한 망막 박리로 실명한 후 사회의 편견과 차별이라는 온갖 시련을 굳은 신앙과 의지로 극복, 세계적인 재활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1972년 2월 결혼을 하고 그해 8월 한국 최초 장애인 정규 유학생으로 아내와 함께 도미, 3년 8개월 만에 피츠버그대학에서 교육학 석사, 심리학 석사, 교육전공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 1976년 4월 한국 최초의 맹인 박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영문판 자서전인 <빛은 내 가슴에>는 미국의회 도서관 녹음 도서로 제작 보급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2001년 세계저명인사 인명사전에도 수록되었습니다.그는 현재 루즈벨트재단에서 탄탄한 입지를 기반으로 한미 우호증진을 위해 민간외교관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런 시련 속에서 사명을 찾았기에 자신은 물론 두 아들까지 미국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는 시각 장애인입니다. 하지만 그는 비 장애인인 우리보다 훨씬 더 밝은 기쁨과 희망으로 의욕 넘치게 살고 있습니다. 그는 성직자 보다 더 뜨거운 소명감으로 하느님의 뜻을 묻고 있습니다. 장애인인 그가 오히려 비장애인을 환한 표정으로 위로하고 평신도인 그가 오히려 성직자를 삶으로 나무라고 있습니다.그런 그였기에 미국에서도 내로라하는 명가를 일궜습니다.
시련을 원망하면 거기서 주저앉고 말지만, 시련을 기회로 삼으면 거기서 위대한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살기가 힘들다고 아우성들입니다. 거리에서는 실패로 좌절하고 낙심한 얼굴들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음울한 기운을 뿜어댑니다.
한국은 DECD 자살 사망률 1위 기록을 7년째 이어가고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우울증이 2020년에 인류를 괴롭힐 세계2위의 질병이 될 것으로 전망한바 있다. 번듯한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채 부모에게 의존해 살아가는 이른바 캥거루족이 적지 않다. 좋은 직장을 구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생계비를 지원하는 일부 부모들의 과잉 보호가 캥거루족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들을 바라볼 때 한편으로는 측은한 마음도 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시련을 바라보는 관점과 그것을 견뎌내는 인내심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입니다.
시련을 이겨내는 힘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에서 나옵니다.
제갈량이 장원두에서 위 나라 군대를 맞아 오장원두에서 최후의 일전을 치를 때였습니다. 그의 군대가 행군을 하는 도중 거센 바람이 불어 군 깃발이 꺾이자 제갈량은 이를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제갈량은 전장에서 병을 얻었고 백방으로 처방을 구했으나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사건을 두고 전혀 다르게 생각해 승리를 거머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청나라 2대 왕인 홍타시입니다. 청나라와 최후의 일전을 앞둔 아침, 그의 밥상다리가 갑자기 부러졌습니다. 그 바람에 상 위에 있던 밥이며 국이며 반찬들이 모두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그 때문에 홍타시는 아침을 거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홍타시는 순간 무릎을 탁 치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됐다! 이 싸움에선 우리가 이겼다. 오늘부터는 이런 나무 소반이 아니라 명나라 궁중에서 쓰는 금 소반에 밥을 먹으리라는 하늘의 뜻이요 계시다. 이기충천한 홍타시와 그의 군대는 필승의 신념으로 명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똑 같은 징조를 놓고 불길하게 여긴 제갈량은 자신의 예견대로 불행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불길하게 여길 수 있는 징후를 기지를 발휘하여 길조로 해석한 홍타시는 그의 기대대로 대승을 이끌었습니다.
나는 일찍부터 응용하였습니다.
흔히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합니다. 좋은 일에는 마가 많이 낀다는 말입니다. 나는 이 말을 순서를 바꾸어서 마음채비를 해두고 있습니다. 다마호사, 안 좋은 일이 자꾸 생기는 것은 좋은 일이 일어날 징조다! 이렇게 말입니다. 사람들이 통념상 재수없는 일이라고 손 꼽는 것들도 나에게는 무조건 상서로운 징조, 곧 길조입니다. 시련 역시 나에게는 100퍼센트 좋은 일이 일어날 징조인 것입니다.
또 시련 자체가 지니는 긍정적인 의미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봄 가뭄이 식물에게는 매우 유익하다고 합니다. 봄날의 좋은 날씨가 오히려 식물들로 하여금 뿌리를 얕게 내리게 하여 생존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태풍이 왔을 때 곡식이 쉽게 뽑히고 맙니다. 하지만 가뭄 때는 식물들이 물과 양분을 얻기 위해 땅속 깊이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려고 합니다.그리하여 태풍이나 가뭄이 와도 끄떡없이 견뎌낼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고난은 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 시켜주는 필수 요인인 듯합니다. 난세영웅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실로 역사의 인물이나 영웅은 모두 고난의 시기에 나왔습니다. 나는 글을 쓸 때나 강의를 할 때도 고난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글을 쓸 때 가슴으로부터 힘 있게 쏟아져 나오는 단상들은 하나같이 나름 시련을 통해서 깨달은 지혜의 편린들입니다. 이런 것들에서 비롯된 문장들은 저절로 써지고 스스로 춤을 춥니다. 하지만 경험 없이 책이나 어디서 들어 알게 된 지식들은 그저 영혼 없는 문장만 만들어 냅니다. 강의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이유로 나는 변심을 모르는 고난예찬론자입니다. 나의 침 튀는 예찬에 어느 조경 전문가가 맞장구를 쳤습니다.
‘야, 저 소나무 굉장히 멋있다. 아주 멋지다.’ 해서 정원에 가져다 심는 나무들은 하나같이 비정상적으로 발육된 나무라는 겁니다. 풍파를 겪느라 뒤틀린 나무들 말입니다. 이 무슨 아이러니입니까. 건강하고 쑥쑥자란 나무들은 잘라서 건축 제료로나 쓰이는데 풍파 겪으며 꼬인 나무들을 ‘아름답다!’하며 찬탄 하다니요. 고가의 나무들은 시쳇말로 기형들입니다. 바위틈이나 그늘에서 햇빛을 향해 가지를 뻗느라 몸이 굽고 뒤틀려 자라난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 오묘한 멋스러움에 더 환호합니다. 왜 인간은 그와 같은 소위 ‘기형 소나무’에 끌리는 것일까요? 인간 안에는 고난의 미학을 볼 줄 아는 천부적인 눈, 곧 심미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생존의 의지로 살아남은 생태계의 영웅들에게 찬란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음을 알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고두고 곁에 놓고 음미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난을 빠져 나오는 문은 고난의 ‘끝’이 아니라 고난을 보는 ‘새로운 눈’에 있다 할 것입니다.
이 자연의 비밀을 깨우쳤던 것인지 미국은 패자부활 존중문화로 시대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를 배출하였습니다.
잡스는 기업가로서도 두 차례의 큰 실패를 맛봤다. 자신이 만든 애플사에서 이사회와 갈등을 빚다 1986년 쫓겨났고 애플에서 나와 만든 컴퓨터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축출 당한지 13년 만에 당당히 컴백했다. 한차례 사업에 실패한 기업인도 ‘비전’만 있으면 편견 없이 인정하는 미국의 토양 덕이다. 미 중소기업청은 통계자료를 토대로 실패 경험이 있는 사업가를 오히려 우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쪽 문이 닫히면 반대편 문이 열린다.’는 말이 있듯, 닫힌 문만 보고 좌절할게 아니라 열린 문을 보고 다시 도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절망을 몰아내는 것은 희망입니다.
어둠이 엄습했을 때 이를 몰아내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펌프로 퍼 내면 어둠이 살아 질까요? 방법은 오직 하나, 빛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이를 ‘대체의 법칙’이라 부릅니다. 심리학에 기초를 둔 이 원리는 이렇습니다.
사람의 뇌는 동시에 두 가지 반대감정을 가질 수 없다. 곧 사람의 머리에는 오직 한 의자만 놓여 있어서 여기에 절망이 먼저 앉아버리면 희망이 함께 앉을 수 없고, 희망이 먼저 앉아버리면 절망이 함께 앉을 수 없다. 이 법칙을 깨닫기만 해도 우리는 절망을 쉽게 대적할 수 있습니다. 내가 불안해 하고 있는 동안에는 나에게 평화가 올 수 없습니다. 내가 평화를 선택하면 불안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절망을 없애려고 하지 말고 희망을 붇잡는 것이 상책입니다. 절망과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자꾸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연거푸 희망을 품는 것이 절망을 몰아내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셰익스피어는 말합니다.
“불행을 치유하는 약, 그것은 희망 이외에는 없다.”
여기서 한 걸음 더.
희망으로도 넘지 못하는 절망을 견디는 힘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사랑! 그 리얼한 교환의 현장이 영화<지붕 위의 바이올린>의 한 장면이 클로즈업됩니다. 주인공 테빗의 아내는 살기가 너무 힘들어 테빗에게 갖가지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그러자 테빗이 아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do you love me(당신은 나를 사랑 하오?)”
그러나 아내는 그의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고 또다시 자신의 고통만 호소합니다. 25년 동안 아이를 낳으면서 힘들고 어렵게 살았다는 등 그간 고생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늘어 놓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테빗이 다시 한번 말합니다.
“I know that, But do you love me(그것은 알고 있오,그러나 당신은 나를 사랑 하오?)”
이 이야기를 우리는 반어법으로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테빗의 말은 아내의 끊임없는 불평에 동문서답으로 응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의 속 깊은 사랑의 철학이 담겨있습니다.
당신이 힘든 만큼 나도 힘들다구! 요즘 세상 살기가 얼마나 각박한 줄 알아? 더구나 유배자 처럼 살아야 하는 내 처지가 얼마나 고달픈 줄 알아? 당신이 쏟아내는 불평보다 나는 더 많은 불평을 갖고 있단 말이야. 하지만 나는 결코 그 불평을 당신 앞에 늘어놓지 않아, 왜인 줄 알아? 사랑하기 때문이야, 당신을 사랑하기에 나는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다구. 그래서 묻는 거야. 당신 정말 날 사랑해?”
결국 이건 치유의 말입니다. 사랑 하나만 있으면 삶의 애환 따윈 쉽게 견뎌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답이었습니다.
사랑에게서 나와서, 사랑으로 살다가, 끝내 사랑의 품에 안기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2012, 1, 25.
차동엽 신부님의 잊혀진 질문 중에서
해 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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