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태어난 인생,
왜 이렇게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러워야 하나?
(신동엽 신부님의 잊혀진 질문 중에서)
독일의 유명 작가이자 시인인 에리히 케스트너는 인간의 ‘숙명’을 군더더기 없는 단문으로 노래합니다.
“요람과 무덤
사이에는
고통이 있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과장일까요? 내 생각에는 아니기도 하고 그렇기도 합니다. 고통에 대한 성찰의 깊이에 따라 생각이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특히 2040세대의 고충을 많이 이야기 하지만 10대의 고달픔이라고 전혀 덜 하지 않으며, 5060 이후 세대가 겪은 애환이라고 가뿐하지 않습니다. 크건 작건 많건 적건, 고통은 언재나 버겁다는 얘기입니다.
고생으로 치자면 나도 빠지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였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지게로 연탄 배달을 했습니다. 가난해서 공고를 갔고, 공고에서 대학진학을 꿈꾸며 몇 곱절 어렵게 공부 해야 했습니다. 20대 말부터 B형 간염 보균자, B형 간염, 간경화로 진행하고 있는 육신을 동무 삼아 건강인 이상으로 업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사제의 본령상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을 꼭 내 것인 양 함께 아파 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도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자꾸 눈에 밟힙니다. 그리고 위암 수술을 받고 병원에서 앉지도 서지도 눕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신음조차 나지 않는 밤을 꼬박 새운 환자의 하소연도 귀에 쟁쟁거립니다.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는 얘기도 흔히들 합니다. 살아서 고통을 겪고, 병들어 고통 속에서 신음 하다가 마지막 죽음마저 고통 속에서 맞이합니다. 그렇다면
“신이 인간을 사랑 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고통은 신의 조화가 아니라 철저히 자연현상임을 확인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지진과 해일로 엄청난 인명 피해와 재산손실 초래로 인한 고통의 체험도, 이혼, 이별, 상처 등의 고통도 역시 자연현상이고 사회적 과정 입니다. 그러니까 고통은 3차원 공간을 사는 모든 존재들이 서로 부대끼면서 ‘생명의 몸살’로 격게 되는 자연발생적인 현상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고통의 책임을 신에게 돌리는 데 익숙합니다. “신은 왜 태초에 고통이라는 것을 허락 했는가?”를 따저 묻거나 “왜 전능한 신이 내 고통을 막아 주지 않는가?”하고 원망하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저의를 염두에두고 고통의 진면목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고통에도 여러 기능이 있습니다.
첫째로 보호의 기능입니다. 고통은 사람을 위험이나 파괴로부터 지켜 줍니다. 육체적 고통은 우리 몸 어디에 고장이 났는지 알려 주는 신호입니다. 이 신호체계가 고장 난 병이 ‘한센병’입니다. 한센병은 손이 썩어들어 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고통을 못 느끼니 조심도 덜 하게 되서 더 많은 손상을 입는다고 합니다. 이는 고통이 없어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 입니다.
둘째는 단련의 기능입니다. 축구선수 박지성의 옹이발바닥, 발레리나 강수진의 붕대발가락은 고통이 가져다 준 영광의 상징입니다. 골프선수 최경주의 휘어진 엄지발가락은 하도 연습을 많이 해서 엄지발가락이 안으로 휘어져 안쪽을 수술로 절제해야 했던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연습의 고통을 거부 했다면 오늘의 그들은 없었을 것입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는 영광 뒤에 숨어있는 고통의 또 다른 비밀입니다.
셋째로 정신적 성장의 계기로서 기능입니다. 인류 문명의 발전은 한마디로 고난 극복의 역사입니다. 고난과 역경에 대항하여 싸우다 보니 오늘의 문명이 이루어 졌다는 말입니다. 계곡이 깊어야 산이 높듯이 고통에서 절망하지 않고 버티고, 창조하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신의, 보다 큰 영광을 누릴 수 있다. 고통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위대한 정신적 성장을 가져와 오늘의 문명이 생겨 난 것입니다.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묻게 해 줍니다.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고통으로 대표되는 한계체험을 ‘최종적 포괄자’를 위한 암호라고 했습니다. 어떤 것이 되었든지 사람이 겪는 어려움은 ‘최종적 포괄자’하느님을 찾게 하는 구실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통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최종적 포괄자와의 상관 관계를 짚어 보면서 더 넓고 높은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좋은 뜻이 아무리 많다 해도 막상 고통이 닥치면 피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최선의 선택은 고통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감래하는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좋은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너의 마음속에 해결 되지 않는 모든 것을 향하여 인내하라. 그리고 문제 자체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라. 답을 찾으려 하지 말라. 그것은 너에게 주어질 수없다. 왜냐하면 너는 그 답과 더불어 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그대로 모든 것과 함께 살아 가는 것이다. 문제 속에서 그대로 그냥 살자. 그러면 먼 훗날 언젠가 너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답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시인 김용택의 시
내 가슴은 늘 세상의 아픔으로 멍들어야 한다
멍이 꽃이 될 리 없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으로 나는 늘 세상의 고통 속에 있어야 한다.
그럴 나이가 되었다. 꽃이 없어도 될 나이.
생각과 행동에 자유와 평화로움을 얻을 때가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어떤 것에도 아쉬워해선 안 된다.
훨훨 나는 창공의 세를 보아라! 평생 물을 보며 살았지 않느냐.
물 같아야 한다.
강물같이 도저해야 한다.
생각이 흐르는 강물처럼 평화롭고 공평해야 한다.
그리하여 나의 가슴은 세상의 아픔으로 늘 시퍼렇게 멍들어야 한다.
그 푸르른 멍은 살아 있음의, 살아 감의, 존재 가치의 증거가 아니더냐.
곱씹어보니 달관도 아니군요. 시인의 가슴을 가득 매운 것은 초탈이 아닌 사랑이었군요. 그 사랑도 보통사랑이 아닙니다. 고통의 이유를 날카롭게 따져 묻다가, 피할 길을 하염없이 모색하다가, 아예 고통을 품어버린 사랑입니다.
“신이 인간을 사랑 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묻는 이에게 역시 고통은 속앓이의 복판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에게도 고통과 불행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주제였습니다. ‘신이 인간을 사랑 했다면’이라는 전제로 미루어 보건대, 묻는 이는 어렴풋이 그 답이 사랑에 있다는 역설적인 진실을 직관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으로 나는 늘 세상의 고통 속에 있어야 한다." 그래도 세상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라. 그것이 사랑이며 그 사랑이 결국 모든 것을 소멸 시키리라.
차동엽 신부의 잊혀진 질문 중에서
2012, 1, 18.
해 봉
'승범(承汎)마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좌절의 순간 출구는 어디에 있나요? (0) | 2012.01.28 |
---|---|
용서하면 행복해진다고요? (0) | 2012.01.21 |
왕따 폭행, 무책임. 나도 한마디 (0) | 2012.01.14 |
登山과 入山, 遊山, 棲山 (0) | 2012.01.05 |
사랑은 고통의 열매다. (0) | 2011.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