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조건
스산한 겨울의 입김이 옷깃을 세우는 계절, 이맘때만 되면 어렴풋한 기억 속에 떠오르는 추억의 단편이 있다. 아주 오래전, 주님의 섭리로 이틀동안 부자동네와 가난한 동네의 표본 가구를 각각 방문해 설문조사를 했다.
유난히도 추웠던 12월, 을씨년스럽게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는 첫날,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1854~1900)의 <거인의 정원>을 연상케하는 홀로 집을 지키는 늙은 퇴역장교의 집을 방문했다. 으리으리한 집안에 들어서자 노인 한 분이 로카유 풍의 의자에 불편하고 쇠약한 몸을 살짝 기대고 앉아 있었다. 설문조사동안 무뚝뚝한 표정으로 바라보기만 했던 노인의 입가에 잠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사람의 목소리를 그리워하는 공허한 눈빛, 외로움에 지친 모습이었다. 조사가 끝나자 고개를 돌리며 서운해 하던 쓸쓸한 뒷모습이 아련하게 남는다. "좀더 얘기하고 가지 그래....." 그목소리에 허전함과 아쉬움이 담겨있었다. 그날은 하루종일 비가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부슬부슬 내린 둘째 날, 구멍이 숭숭 뚫린 구름다리를 아슬아슬하게 건너자 다닥다닥 붙어 쓰러져 가는 판잣집이 즐비한 빈민촌이 펼쳐졌다. 구름다리를 사이에 두고 한 쪽은 번화가, 다른 한 쪽은 허물어지기 일보 직전의 적막한 폐허 같았다. 주소조차 제대로 표기되지 않아 헤맸고, 설상가상으로 세찬바람이 지독히 매섭게 불어 손발이 꽁꽁 얼어붙었다.
그런데 염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2코린 6,10)"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비록 가난 하지만 더 많은 소중한 것을 가진 사람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머리를 들수 없을 정도로 천정이 낮고, 앉을 자리조차 없는 비좁은 공간에서 어렵게 설문조사를 했지만 마음은 따뜻했다.
먼저 월 십여만원의 정부 지원금이면 충분하다는 노부부의 자족의 미소를 만났다. 그 어떤 보물보다 빛나는 노부부의 미소는 여유롭고 풍요롭기까지 했다. 십만원이 적지 않느냐는 말에 "그것이면 충분하다."며 소박한 웃음을 띤 노부부. 선물로 드리는 우산에 감격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실상 우산을 선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마음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또 그곳에서 월 십만원의 급여로 늙으신 시부모님을 봉양하는 며느리를 만났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살아 병으로 얼굴이 퉁퉁 부어 버렸지만 해맑은 웃음을 지닌 아주머니는 추위에 지친 낮선 이에게 따뜻한 보리차 한잔을 건넸다. 정다운 미소로 사람을 반기는 아주머니의 모습에서 성모님의 자비로운 사랑의 미소를 발견했다.
어느세 보슬비는 흩날리는 눈발이 되어 날리고, 가로등이 어두운 저녁을 비출 무렵, 따뜻한 풍경 속에 머물렀다.온 가족이 둘러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고, 집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낮은 담 넘어로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아주머니의 손이 바빠지자 굴뚝에 연기가 솟아 올랐다. 꼬마 아이가 문밖에서 서성이며, 시린 손을 부비며, 발을 동동거리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저 멀리 노동에 지쳐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오는 아버지가 보였다. 쪼르르 달려가 안기는 아이를 아버지가 번쩍안고 들어갔다.
"아버지가 오셨어" 그리고 문밖에서 들릴만큼 가족들의 행복한 대화가 들렸다. 그리고 아버지의 지친 얼굴이 빛나는 환한 미소로 채워졌다. 그 순간 흩날리던 눈이 굵은 눈송이로 바뀌기 시작하고, 차츰 함박꽃으로 피어나 온 세상을 하얗게 밝혔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구름다리를 건너 돌아오면서 잠깐 천국을 였보고 돌아 온 것 같았다. 그리고 주님께서 배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렸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그 날, 가난함 속에서 소중한 것들을 품고 가꾸고, 사랑을 나누며 욕심 없이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이천년 전 초라한 마구깐에서 목동들과 함께 소박한 행복을 누리며 기쁨에 넘치셨을 성가정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통 중에서도 주님께서 함께하시며 소소한 행복이 머물렀을 성가정이다. 작은 것에 감사하며 사는 노부부의 가난한 미소, 또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늘 기다려 주고 함께하는 넉넉하고 푸근한 가족간의 사랑이 그들의 행복이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던 것은 아닐까. 더불어 모든 것을 가졌지만 외로움과 무력감 속에서 간신히 삶을 지탱하고 있는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이웃이 주위에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겠다.
하느님 안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콜로새 4.2)" 있을 수 있다면,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 필요충분한 모든 것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으며, 새로운 한해도 기쁘게 살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오소서, 주 예수님. 어서 빨리 오소서. 데오 그라시아스(Deo gratias). 아멘"
2012, 12, 2.
- 서전복 안나(동양화가, 미술교육가)-
천주교수원교구 위로의 샘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