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글

말과 품격

승범(承汎) 2013. 8. 14. 20:48

성숙의 불씨
 
 339호 2013. 8. 13
‘성숙의 불씨’는 성숙한사회가꾸기모임에서
주 1회(화)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말과 품격 - 막말정치를 慨歎한다.

 

 

언어는 그 사람의 인격과 품위를 드러낸다. “언어는 인간정신의 가장 좋은 반영이다.” 라이프니츠의 말이다. 언어가 의식의 반영임을 강조한 것이거니와, 언어사용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내면적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말은 사람의 됨됨이를 가늠함에 있어 중요한 잣대 가운데 하나다.

최근 막말논란이 정치권을 휩쓸었다. “야, 너 인간이야? 난 너 사람으로 취급 안 해.”, “양의 탈을 쓰고, 아주 못된 놈이야, 저거.” 국정원 대선 댓글 의혹 관련 국정조사장에서 야당의 한 여성 최고위원이 자신에게 퍼부었다고 여당 동료의원이 문제를 제기한 말들이다. “씨x”이라고 했다거니, 그게 아니라 “에이 씨”라고 했을 뿐이라거니, 비공식석상에서의 욕설 여부로도 다툼을 벌였다.

정치판에서의 막말논란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공업용 미싱으로 입을 드르륵 꿰매는 게 필요하다”, “경제를 죽인 노가리”, “새해 소원은 명박급사” 등, 당대의 대통령들을 대상으로 쏘아댄 저주 섞인 험담들이 크나큰 파문을 초래했는가 하면, 여성 대통령 후보를 겨냥하여 “그 년 서슬이 시퍼레서 말도 못하고...."라는 막말까지 튀어나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정치인들의 막말 작태는 끊이지 않아, 최근의 논란이 불거지기 얼마 전에도 야당 원내대변인이 뜬금없이 ‘귀태(鬼胎)’ 발언을 내놓아 여론의 철퇴를 맞고 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연이어 경남지사에 대한 ‘유태인 학살’ 발언이 돌출하기도 하였다.

대다수 의식 있는 국민들을 아연실색케 했던 나꼼수의 육두문자 방송, 한 전직 총리를 비롯하여 몇몇 내로라하는 정치인들이 시도 때도 없이 쏟아내는 정제되지 않은 막무가내식 의사표현, 일부 저급한 수준의 사회지도급 인사들이 생각 없이 입에 담는 성적, 여성차별적 발언 등등, 부글부글 속을 끓게 하는 막말들이 일일이 기억하기 어려울 만큼 수없이 많이 자행되어 왔지만, 정치를 파행으로 치닫게 했던 대표적인 사례들 중 몇몇 개만 추려보아도 이렇다는 얘기다.

막말은 기본적인 소양이 결여되어 있고, 정신세계가 천박한 사람에게서나 나올 수 있는 말이다. 그것은 시정잡배들에게나 있을 법한 부적절한 인성과 가치관에서나 비롯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정치계 일각에서 반복적으로 막말이 자행되고 있다는 것은 인격이, 의식세계가, 그리고 가치관이 그렇듯 저열한 수준밖에 되지 않는 인간 군상들이 정치판에서 보란 듯이 활개를 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어떤 심리학자는 정치판에서의 막말 현상을 두고 “사람들 기억에서 멀어지는 게 가장 두려운 정치인들은 나를 과시하려는 욕구나 영웅주의 심리에서 막말을 하는 경향이 있다”고 진단한다. 또 일부에서는 우리나라 정치계에서 막말이 거듭되는 원인을 정치인들이 진영논리에 갇혀 헤어나지 못하는 데에서 찾기도 한다. 견해가 다른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기보다는 극단의 비난과 저주를 퍼부음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원인을 무엇에서 찾든 욕설과 분노와 저주, 그리고 갖은 모략과 중상과 비방, 인격모독성 조소와 비아냥으로 점철된 막말이 용인을 받을 수 있을 여지는 어디에도 없다. 막말 내뱉기를 일삼는 정치인들은 사회지도층 인사로서 품위 있는 인성을 갖추어야 할 의무를 스스로 방기한 인격파탄자에 불과할 뿐이다. 

의회정치 선진국인 영국, 미국에도 정치인들의 막말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들 나라에서는 막말정치인들이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정치적 공격을 가함에 있어서 상호 최소한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데 대한 공유된 인식이 있다. 파키스탄 테러범에 대해 1000만 달러 현상금을 내건 오바마 미국대통령에게 “오바마에게 1000만 파운드 현상금을 걸겠다”고 비난한 영국 상원의원이 의회에서 정직조치를 받았다. 지켜야 할 선을 넘었다는 이유에서다. 미국 상원의원 선거에서도 유력했던 하원의원 출신 출마자가 상대 여성후보를 “더 높은 세금과 더 강한 규제를 물고 오는 개”라고 부르고, “성폭행으로 임신할 가능성이 없다”는 막말을 입에 올려 유권자들로부터 지탄을 받고 낙선하고 말았다.

영국 하원의 경우 여야 의원들이 아주 가까이 서로 마주 보고 앉아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상대방을 공격하는 발언을 할 때에도 반드시 “존경하는 OO의원님”이라는 말을 붙인다. “존경하는 OO의원님께서 내가 낸 세금으로 제대로 교육을 받으셨는지 의심스럽다.” 존 메이저 전 영국총리가 야당의원의 공격을 맞받아치며 한 말이다. 이는 영국에서 대표적인 정치모욕으로 치부될 만큼 수위가 높은 발언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정치 상대방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규칙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적 입장의 차이로 인해 서로 신랄한 공격을 주고받을 때에도 무언중에 공유하는 규칙을 준수하는 가운데 상호 최소한의 예의를 저버리지 않는 선진 의회정치 문화가 막말논란으로 파행을 일삼는 우리 정치현실에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막말이 야기할 정치적, 사회적 파장이 어떠할 것이라는 것쯤을 모르는 정치인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거리낌없이 막말을 뱉어내는 것은 자신의 발언이 주목받고, 이를 통해 대중적 지지를 끌어들이겠다는 심리의 발동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그 같은 셈법이 광신적 지지세력을 결집하는 데에는 부분적이기는 하겠지만 통할 여지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로 인해 배태되는 저주와 증오는 분열과 갈등을 증폭시키고, 성숙사회 건설의 관건인 사회적 통합을 요원하게 만든다.

정치판 막말의 난무를 언제까지 그대로 놔두고 구경만 할 것인가? 표현의 자유는 그런데다 갖다 붙이라고 있는 권리가 아니다. 막말정치, 이젠 정말로 끝장을 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은 정치인들에게 절절히 자기반성을 하도록 다그쳐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먹히지 않을 때는 국민주권의 행사를 통한 준엄한 심판으로 막말 정치인들의 정치생명을 끊어놓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곧 선진 성숙사회로 나아가는 길이 될 것이므로.

 

 

 

글쓴이 / 김상배

·서울시립대학교 철학과 교수
·장충고계학원 이사
·전 서울시립대학교 인문대학장

※ 글 내용은 성숙한사회가꾸기모임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