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배우자
역사에서 배우자.
오늘은 집사람과 같이 남한산성으로 갔다. 남부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북문을 통하여 성곽의 계단길을 피하여 숲속 흙길을 걸었다. 남한산성 본성에 있는 동장대(東將臺)터에서 암문을 통해 벌봉으로 갔다. 그래서 벌봉에 얼킨 얘기로 우리의 역사 를 다시한번 뒤져보게 되었다.
이시조선 15대 광해군은 14대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선조는 자신이 후궁 소생이었기 때문에 정실부인 왕비에서 난 자식을 세자로 삼고 싶었다. 그러나 왕비와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후궁출신의 광해군을 늦게 18세 때 세자로 책봉했다. 그 시기에 임진왜란이 발발했기 때문에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가면서 전쟁의 지휘권을 세자에게 넘기고 떠났다. 그래서 조정은 분조(分朝)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다. 세자는 아버지를 대신해 의병을 독려하고 백성을 위로하는 역활을 충실히 해 냈다고 한다. 전쟁을 통해 광해군은 다음 왕으로서 자질을 채워가고 있었고 백성들의 지지도 높았다. 전쟁 때 피란 갔다온 선조의 인기는 하락하고 광해군의 인기는 상승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조는 왕의 자리가 불안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가 싶다. 이때 왕비가 세상을 떠나고 선조는 51세의 나이에 19세의 새로운 왕비를 맞게 된다. 그리고 55세에 왕자를 얻게 된다. 그가 바로 영창대군이다. 왕실이 이렇게 변하고 보니 세자 광해군은 세자자리에 불안감을 갖게 됨은 물론이고 신하들도 두 세력으로 갈라진다. 임진왜란 이후, 왜적과 싸운 북인들은 성장은 했는데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새로 태어난 적장자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로 나눠지고 말았다. 그리고 선조의 마음을 읽은 소북파는 왕세자를 영창대군으로 바꾸자고 말했다. 그러나 영창대군이 3세 때 선조가 승하하자 우여곡절 끝에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광해군은 항상 왕위가 불아했다. 그래서 위협이 될만한 종친들을 거이 모두 살해 재거했다. 하나의 예로 정원군(인조의 아버지)의 가족이 살던 집터가 '왕의 기운이 서린 곳'이란 말을 듣고 그 집안을 풍지박산 내버렸다. 능양군(인조)은 아버지도 잃고 아우도 잃는다. 이것이 나중 인조반정의 원인으로 되어버렸다. 그래도 광해군은 험난한 전쟁을 온 몸으로 겪은 왕이라 백성들의 궁핍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에 전후 복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광해군이 시행한 개혁사업은
첫째 양전사업(量田事業)이다. 전쟁으로 크게 회손된 토지를 제 정리하고 토지대장에 누락된 토지는 다시 기록하여 세수확보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둘째는 병으로 지친 백성들의 펴안한 삶을 위하여 선조 때 시작해서 정유재란으로 중지되었던 '동의보감'을 완성시켰다. 선조가 죽을 때 그 책임을 물어 유배생활을 하던 허준을 다시 불러 완성시켰다. 세째 대동법(大同法) 시행이다. 그 시절의 세금의 원천은 토지를 중심으로 한 전세(田稅), 노동력을 제공하는 역(役)세, 지역의 특산물을 내는 공납(貢納)이었다. 이중에 가장 문재가 된 것이 공납이었다. 관리들의 비리가 성행했고 납세자의 거짓이 판을 치고 있었다 그래서 공납의 기준을 '집집마다'에서 토지에 두고, 토지를 많이 가진 부자들에게 많은 세금을 메긴 것이다. 대동법이란 국민 모두가 잘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세금제도란 뜻이란다. 그시절에 가장 큰 혁신인 것 같다.
그 다음이 외교문제다. 임진왜란후 전쟁없는 평화로운 나라와 백성을 위한 실리외교, 중립외교였다. 선조시절 중국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파견 지원했던 명나라는 점점 쇄퇴해 가고 북방민족 여진족이 힘을 키워 나라를 건국하였으니 바로 '후금'이다. 물론 선조는 '친명배금' 이다. 그러나 광해군은 실리를 추구 중립외교를 섰다.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억만진창이 되었는데 여기서 다시 후금이 처들어와 전쟁을 이르키면 조선이란 나라는 파멸이란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래서 명나라에서 후금과 전쟁이 벌어졌을 때 임진왜란 때 우리도 원군을 보내줬으니 이번엔 조선에서 원군 지원을 해달라는 요청이 와서 김홍립 장군을 대장으로 지원군을 보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일찌감치 항복하고 말았다. 이는 후금에 대한 배려로 생각해서다.
그런데 그 시절 조선이란 나라는 대의, 의리, 명분을 중시하는 유교국가이었다. 그러니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오랑케들이나 하는 짓이라 평하고 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의 뒤통수를 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 하고 서인세력들은 광해군을 더이상 왕으로 새울 수 없다고 하면서 광해군의 과거 폐모살제(廢母殺弟)를 거론하며 이르킨 사건이 인조반정이다. 물론 앞에서 얘기한 종친살해와 중립외교가 반정의 원인이 되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나중에 제주도로 옮겨졌다. 49세에 폐위되고 18년의 유배생활끝에 1641년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여기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평가한다면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하는 물음을 던저볼 수 있을 것 같다. 종친들을 살해하고 폐모살제한 일은 처벌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전쟁터에 나가 전투에 임하고 몇가지 개혁정책으로 사회를 개혁한 일, 중립외교를 써서 전쟁없이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었던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 아닌가 싶다.
2018, 3, 21.
承 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