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의 삼궤구고두례
인조의 삼궤구고두례
3월 17일(토) 오후 집사람과 같이 남한산성으로 등산을 갔다. 남문주차장에 주차를 해 놓고 북문으로 해서 본성 동장대(東將臺)터에서 암문을 통해 벌봉으로 올라갔다. 남한산성은 등산이라기 보다는 역사유적지 관광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 것만 같다. 그래서 인조의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란 말이 생각나서 책을 뒤저봤다.
인조는 이시조선 16대 임금이다. 선조의 손자이며 15대 광해군의 조카다. 즉 선조와 후궁 인빈 김씨의 아들 정원군의 장남이다. 선대 광해군의 중립외교정책에 반발하던 서인과 뜻을 같이하여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의 정치배경은 서인이다. 그랬으니 외교정책은 당연히 선조가 했던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펼칩니다. 즉 쇠퇴해 가는 명나라와 가까이하고, 세력이 커지고 성장해 가는 후금을 배척하는 외교정책이다. 이것이 대의,의리,명분을 중시하는 유교국가의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인조는 1623년 즉위하여 1627년에 정묘호란을 맞게된다. 정묘호란 이전에 이괄의 난을 격는다. 사람들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똘똘뭉치지만 막상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분열하게 마련이다. 이괄이란 장수는 인조반정 때 큰 공을 새운 장수다.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을 때 반정에 참여하여 반정군을 통솔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하는 서인들은 이괄의 공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배척하였다. 그 이유는 인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서인 김유와의 갈등 때문이었다. 어느날 김유가 이괄의 아들이 반란을 일으킨다고 전한다. 이에 화가 난 이괄이 아들을 잡기위해 온 금부도사를 "아들이 역적인데 아비가 무사할 수 있겠느냐"며 금부도사를 살해해 버린다. 그리고 군대를 이끌고 난을 일으킨다. 이것이 '이괄의 난'이다. 그러나 부하 장수의 배신으로 이괄의 북방세력은 무너진다. 이때 밑에 있던 장수들이 후금으로 도망가 조선을 침공하자고 부추킨다. 후금은 친명배금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차에 웬 떡이냐며 3만의 군대로 '전왕 광해군의 원수를 갑는다'며 조선을 침공한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을 간다. 후금은 더는 전쟁을 계속하지 않을테니 명나라와는 친교하지 말것을 당부하며 조선과 '형제관계'를 맺을 것을 당부한다. 이에 조선은 오랑케로 여기던 후금과 화친을 맺고 군대를 철수하니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그후 후금은 점점 세력을 키웠고 1632년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꿀 을 명한다. 그리고 점점더 힘을 키워 후금에서 '청'으로 국호를 바꾸더니 조선을 더 압박해 온다. 이때 조선에선 오랑케에게 또다시 무릎을 꿇을 수는 없다는 '척화론자'와 우리보다 군사력이 월등히 강한 걸 무시할 수는 없다. 현실을 인정해야한다는 '주화론자' 로 갈라졌다. 유학을 하고 의리와 명분을 목숨보다 중하게 여기는 조선사회라 결국 죽더라도 의리를 지키겠다며 '척화'를 선택하였다. 이에 청은 "죽고싶다고? 그래 죽여주마"하고 1636년에 처들어 왔으니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이때 인조는 강화도로 도망가려 했지만 청의 군사들이 길을 막고 있었고, 남쪽으로도 퇴로가 막혔으니 할 수없이 피난을 한 곳이 '남한산성'이다.
이에 청나라 군대는 남한산성을 둘러싸고 특히 벌봉을 선점하였다고 한다. 그러고는 "나와라! 나와라!"라고 합니다. 남한산성 안에서 신하들은 항전할 것이냐 항복할 것이냐 대립하였지만 결국 인조는 항복할 것을 선택한다. 때는 한겨울이었다. 인조는 북문을 통하여 청태종이 기다리고 있는 삼전도로 맨발로 질질 끌려가고 말았다. 삼전도는 지금은 아파트 단지다. 그때는 한강에 있는 섬으로 된 나루터였는데 지금은 3공화국 때 매꾸어서 아파트 단지로 만든 삼전동이다. 꽁꽁 얼어붙은 강 바닥에 제단을 쌓고 청나라 황제가 앉아 있었다. 맨발로 얼음판 위에 선 인조는 무릎을 꿇고 양손을 바닥에 댄 다음, 머리가 바닥에 닿도록 3번 숙이고 절을 올렸다. 그렇게 세번의 절을 올렸다. 그레서 세번 무릎을 꿇고 아홉번의 절을 올렸으니 이를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라 한다. 삼궤구고를 하고나니 이마가 찢어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삼전도의 굴욕 사건"이다.
뿐만 아니라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와 차남 봉림대군이 인질로 끌려갔다. 조선의 여자들 또한 끌려갔다. 청나라 사람들의 노리개용으로 말입니다. 나중 그 여자들이 되돌아왔을 때 그 여자들을 환향녀(還鄕女),또는 속된 말로 회향년이라고 했다. 돌아온 그들은 집안에서도 버림받고 말았겠지요. 정말 치욕적이고 슬픈 역사였습니다.
그러면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소현세자는 8년동안 청나라에서 인질생활을 하면서 꿋꿋한 자세로 살아가면서 직접 농사를 짓기도 하고, 청나라 황제가 배푸는 각종 행사에도 참여하고, 다양한 교류를 통해 훌륭한 외교관 역할도 하게되었다. 이것이 오히려 아버지 인조는 자기에게 치욕을 안긴 청나라 왕족들과 가까이 하면서 외교관 역할까지 하게되니 자랑스럽기는 커녕 오히려 왕위를 세자에게 뺏길까 걱정할 정도로 불안요소로 작용한 것 같다. 그후 8년 동안의 인질에서 풀려나 귀국했으나 3개월도 되지않아 세자는 죽게되고 세자빈은 왕으로 부터 사약을 받고 죽게된다.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한 독살설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런 근거도 증언도 없었다고 한다. 다만 '실록'에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인조왕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인조왕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사람이다. 요즘말로 하면 광해군을 탄핵시키고 광해군의 반대편에 있던 서인들의 힘을 엎고 왕이 된 사람이다. 그렇다면 탄핵된 광해군 보단 더 정치를 잘했어야 할텐데 내가 봤을 때는 광해군 보다 더 못한 왕이라고 생각되고 정말 무능한 왕이었다고 생각된다. 광해군은 폐모살제(廢母殺弟), 종친살해 등 실책도 있었지만 7년간 지속된 임진왜란 때 직접 전투에 나가 지휘하고 참전했던 일, 전쟁이 끝난 후 왕이되어 폐허가 된 농토를 정리하는 양전사업(量田事業), 부상당하고 허약해진 국민을 위하여 옥살이하던 허준을 사면 東醫寶鑑을 완성케 한 일, 뭐니뭐니해도 관리들의 비리가 극심했던 공납(貢納)제도를 개혁한 대동법(大同法) 시행, 전쟁에 지친 국민들에게 전쟁없는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기위해 점점 약해져가는 명나라와 강해져 가는 후금(후일 청나라) 사이에서 실리적인 중립외교를 택한 일 등은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반면에 인조는 개혁적인 정책도 없고,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전쟁에 휘말려 망국의 위기까지 갔다고 생각된다. 한편, 나는 남한산성을 갈 때 마다 벌봉쪽을 바라보면 청나라에선 남한산성을 치려면 벌봉을 선점해야 한다는 것을 여러 측면에서 분석하고 현지 답사까지 하고 갔다는데 우리 조선은 많은 돈을 들여 성곽을 쌓으면서 뭐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인조반정은 잘한 것일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018, 3, 23.
承 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