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마주할 수 있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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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마주할 수 있는 용기 >
사람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만나 내일의 내가 됩니다. 여기서 ‘만난다’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것일 수도, 책이나 영화를 만나는 것 일수도 있습니다. 화가 친구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저를 모델로 초상화를 그려주었습니다. 완성된 그림을 보여주며 “창옥아? 어때?” 하고 묻는 친구에게 저는 바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림 속 저는 고단해 보였고,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 데다 촌스럽고 나이 들어 보였습니다. ‘왜 나를 저렇게 표현했지? 저게 나인가?’
모든 사람은 화가와 같습니다. 상대방을 자신이 생각하는 이미지로 그려냅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걸 상대방에게 말해 주지요. “넌 이런 사람이야.” 하지만 그 이야기를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자존심이 센 사람,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향이 뚜렷한 사람. 내가 되고 싶은 이미지가 명확한 사람일수록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현존하는 자신과 추구하는 자신이 다른데도 말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들이 생각하는 나 사이에 차이가 크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습니다.
누군가 나를 그려줬다면 ‘내 모습이 정말 그런가’하고 바라보세요
초상화에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있고 그려지는 모델이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화가처럼 누군가를 그리고, 또 누군가의 모델이 됩니다. 여러분들도 배우자나 친구, 동료들에 대해 마음속으로 그림을 그릴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런 느낌이야’ 하고요. 처음에 화가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네 안에 있는 거침이 내 안의 거침을 그린 거 아냐? 네 안의 피곤함이 내 안에 있는 피곤함을 본 거 아니야?” 왜냐하면 화가 내면에도 많은 패턴과 색깔이 있을 것이고, 자신의 상태에 따라 그 색깔과 패턴이 먼저 보일 테니까요. 사람은 내 안에 있는 부분을 타인에게서 먼저 봅니다. 누군가 싫다면 그 사람에게 나와 비슷한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화가 안에 투박함이 있어서 제 투박함을 봤을 수는 있지만, 저에게 그 투박함이 없었더라면 화가는 그걸 그려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누군가가 그려준 그림을 보고 외면하지 마십시오. 잠시 자신에 대한 사랑을 덜어내고 ‘내가 정말 저 모습인가?’하고 바라보십시오. 비록 그 모습이 내가 인정하지 싫은 소심하고 나약하고 비겁한 모습이라 하더라도.
화가에게 초상화를 의뢰하는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대부분 “예쁘게 그려주세요”라고 하면서 예쁘게 그려 주지 않으면 서운해 합니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 그려주세요”라고 말하면서 내 안에 있는 에너지와 질곡을 작가가 보고 있는 그대로 그려주기를 바라고, 또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말할 건가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변화의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