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범(承汎)마당

영주 부석사,청량사를 다녀와서

승범(承汎) 2016. 11. 4. 22:42

 

 

                                                                      영주 부석사,청량사를 다녀와서

 

      우리 낙원회 회원 16명은 2016년 10월 21일 1박2일 일정으로 청량리역에서 기차여행을 떠났다. 무궁화호에 몸을 싣고  먹으면서 떠들면서 가다보니 어느덧 풍기역에 도착했다. 기다리는 버스를 타고 부석사로 향했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종찰로서 화엄종의 근본 도량이다.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애틋한 창건 설화를 간직한 부석사에는 그 이름의 유래가 된 '뜬 돌(浮石)이 무량수전 서편에 남아있다. 중요 문화재로는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인 무량수전(국보제18호), 조사당(국보19호), 석등(국보 제17호) 등이 있다.

      부석사는 창건 후 신라 말, 고려 초기에 兵火로 소실 되었다고 전한다. 무량수전 동쪽 언덕에 있는 "원융국사비문(圓融國師碑文)에는 원융국사가 부석사에 머물면서 부석사를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원융국사는 입적할 때까지 머물렀다고 한다. 그리고 부석사는 경사지를 따라 여러단의 석단(石壇)위에 건물이 자리하고 있어 오르는 과정도 아름답고 무량수전을 뒤로하고 바라보는 소백산의 풍광도 아름답다.

 

      우리는 부석사에  도착하기 전 이곳의 명물인 사과밭에 들렸다. 주인 왈, 1인당 3개씩만 손수 따서 가져 가란다. 나는 욕심이 생겼다. 몰래 몇개를 더 따서 봉투에 넣을까 했더니 집사람이 야단을 쳐서 3개만 따고 말았다.

 

 

 

 

착한 우리 낙원회 사람들은 딱 3개씩만 따서 봉투에 넣고 감사 인사를 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식사 후 부석사로 올라갔다.

 

 

 

 

부석사  당간지주

 

 

 

 

 

 

 

무량수전(無量壽殿)

      무량수전은 고려시대 목조건물로 무량수불(無量壽佛:무한한 수명을 지닌 부처)인 아미타불(국보제45호)을 봉안하고 있는 국보 제18호다..우리나라 목조건물 중 가장 아름다운 목조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그리고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진 바위가 있는데 설화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흠모하던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도적때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앉았다고 전한다.

 

 

 

삼층석탑

 

 

 

 

이렇게 부석사 관광을 마치고 소수서원으로 향했다.

      이 소수서원(紹修書院)은 풍기 군수였던 신재 주세붕(周世鵬) 선생이 고려말의 유현(儒賢)인 안향(安珦)선생의 연고지에다 중종37년(1542)사묘(祠廟)를 세워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다음해에는 학사(學舍)를 건립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데서 비롯되었다. 명종5년(1550)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풍기군수로 제임하면서 나라에 건의, 왕으로부터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사액(賜額)을 받게되어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공인된 사립고등교육기관(한국 최초의 사립대학교)이 되어 퇴계선생의 제자 대부분을 포함하여 4천여명의 유생을 길러 내었다.

     이곳에 주향(主享)된 회헌(晦軒) 安珦(1243~1308)선생은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등을 거치면서 문교진흥에 진력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이시며 동방 신 유교(新 儒敎)의 비조(鼻祖)이다.

 

영정각(影幀閣)

直方齋와日新齋

 

선비촌

 

 

 

 

다음날 우리는 청량산 청량사로 향했다.

청량산 청량사 입구에서

 

      기암괴석과 열두봉우리로 이루어진 청량산 한 가운데에 자리잡은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송광사 16국사의 끝 스님인 법장 고봉선사(1351~1426)에 의해 중창된 천년 고찰이다. 한때는 신라의 고찰로 신라 불교의 요람을 형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불교를 억압하는 주자학자들에 의해 절은 피폐하기도 했다.

청량산의 최고봉인 의상봉은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께서 입산수도한 곳이라 의상봉이라 불리며 열두개의 봉우리와 8개의 굴과 4개의 약수터도 있다.

창건 당시에는 청량사의 본전인 유리보전을 비롯 33개의 건물을 갖추고 있었으며 봉우리마다 자리잡은 암자에서는 스님들의 독경소리가 청량산을 가득 매웠다고한다.

 

 

 

청량산 입구에 있는 퇴계 이황 선생의 시비다.

 

      아름다운 산하는 많은 관객들을 불러들인다. 그 관객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마음의 짐을 나도 모르게 벗어던진다. 비워버린 그 마음안에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어떤 형태로든 가득 매워질 수 있다. 매워진 그 사람이 바로 자연의 주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청량산의 주인은 퇴계 선생이다. 오늘은 우리 낙원회 회원들이 주인이다. 퇴계선생께서는 어제 영주에서 본 소수서원의 많은 제자들과 함께 이 아름다운 청량산을 그리며 많은 시구를 읊지 않았을까싶다.

 

 

 

 

 

 

 

이렇게 급한 경사길을 따라 드디어 청량사에 도착했다.

유리보전(琉璃寶殿)

유리보전은 청량사의 본전이다. 정면 3칸, 측면2칸으로 그리 크지는 않지만 세계를 다스리는 약사여래를 모신 전각이라는 뜻이니 안에는 약사여래상이 모셔져 있다. 건물 대들보 밑에 사이기둥을 세워 후불벽을 설치한 것은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특징으로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현판은 고려 공민왕이 쓴 글씨다. 홍건적의 침입 때 안동지역으로 몽진(蒙塵: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감)했을 때 여기를 들렀을 때 쓴 것이라고 한다.

 

 

 

저 멀리 가운데 정면으로 보이는 것이 유리보전이다.(가운대 소나무가 삼각우송?)

 

 

 

      원효대사가 청량사 창건을 위해 의상대사와 함께 힘을 솓고 있을 때, 아랫동내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를 만났는데 뿔이 셋인 소를 대리고 논을 갈고 있었다. 그런데 이 뿔이 셋이 달린 소가 무슨 영문인지 농부의 말을 듣지않고 제 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이때 원효대사가 농부에게 다가가 소를 시주하는게 어떻겠느냐고 권하니, 농부는 흔쾌히 이 소를 절에 시주하겠다고 하였다.원효대사는 농부에게 소를 건내받아 절로 돌아 왔는데 조금전만 해도 제 멋대로 날뛰던 소가 신기하게도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것이었다. 소는 청량사 짓는데 필요한 제목이며 여러가지 물건을 밤낮없이 운반하고는 준공을 하루 남겨놓고 생을 마쳤는데 이 소는 '지정보살'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원효대사는 이 소를 지금의 삼각우송 자리에 묻었는데 그 곳에에서 가지가 셋인 소나무가 자라 후손 사람들이 이 소나무를 "삼각우송(三角牛松)이라하고 이 소의 무덤을 "삼각우총(三角牛塚)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이 글을 일찍 읽어보지 못해서 사진을 제대로 찍지를 못했는데 위 사진에 보이는 저 소나무가 아닐까 싶다.왜냐하면 아래 현판이 바로 그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층석탑

근래 새로 조성되었지만 건너편 산세와 너무 잘 어울려 그 경관이 일품이다.

나는 청량사 다 와 갈 무렵에 청량정사(오산당)란 표지판을 봤다. 오산당이란 표지판이 눈에 확 들어왔다.그래서 따라 올라 갔다.

 

청량정사(淸凉精舍)

퇴계 선생은 청량사를 좋아했으며 어려서부터 청량산을 드나들면서 공부를 했고 후학들을 모아 강론도 즐겨했다고 한다. 그렇게 퇴계가 공부하던 곳에 문인들이 1832년에 건물을 짓고 오산당(吾山堂)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 바로 청량정사다. 1896년 소실된 것을 1901년 중건한 것이다.

 

 

 

 

청량산 박물관

 

이렇게 우리는 청량사 관광을 마치고 안동 하회 마을로 향했다.

 

 

 

 

 

안동에서는 하회마을 하회별신 굿탈놀이만 보고 풍기역으로 향했다.

풍기역으로 가는 도중에 휴식을 취한 곳이 바로 예천 천향리 석송령이 있는 이곳이다.

 

석송령(石松靈)

 

이렇게 우리는 1박2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다시 풍기역에 도착, 무궁화호가 아닌 새마을호 열차를 타고 귀경길에 올랐다. 관광도 즐거웠는데 기차도 격이 달라졌으니 기분이 더더욱 좋았다. 청량산의 기를 받아서인지 모두들 얼굴엔 피곤한 기색은 찾아볼 수도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덕담 나누면서 청량리 역에 도착, 귀가길에 올랐다.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6, 10, 22.

                                                                           承  氾